부산 여행의 재구성

기장군 기장읍
매만진 자연의 경계에 머무르다

부산 동북부 끄트머리의 기장은 늘 변방이었다. 실제 행정 구역의 변천사만 살펴봐도 그렇다. 일제강점기 때 동래군에 병합되었다가 이후 양산군으로 통합되었고, 기장군의 지위를 되찾는가 싶더니 부산광역시에 편입되고 만다. 이제 이런 얄궂은 운명도 과거의 일로 남겨졌다. 근래 부산에서 가장 주목 받는 동네가 바로 기장이니 말이다. 그 중심에는 지난해 여름 오시리아 관광단지의 일환으로 조성한 아난티 코브가 있다.
짙푸른 하늘과 동해 바다의 경계가 묘하게 중첩된 풍경. 바로 그 곁에 자리한 아난티 코브는 힐튼 부산과 회원제로 운영하는 아난티 펜트하우스가 공존하는 복합 휴양 리조트 단지다. 차를 세우기 위해 아난티 코브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초현실적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드롭 존이 모습을 드러낸다. 매끈한 원형 통로 한 면에는 망망한 동해 풍경이 작품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힐튼 부산 지하로 연결된 아난티 타운은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이용이 가능하다. 매일 천연 온천수를 끌어올리는 스파와 서점, 야외 공연장, 해변 산책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곳에는 휴가철이 지난 시기에도 인파로 북적인다. 최근 문을 연 이연복 셰프의 목란과 이탤리언 레스토랑 볼피노, 브런치와 비스트로를 결합한 오버랩 등 부산 도심에서 접하기 힘든 수준 높은 다이닝도 이런 인기에 한몫한다. 아난티 타운의 중추처럼 드넓게 펼쳐진 서점 이터널 저니 역시 마찬가지. “도쿄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티사이트를 연상시키는군요. 넉넉한 공간에 테마별로 나눈 서가의 구성이 흥미롭네요.” 김종관 감독이 거대한 책의 터널로 이뤄진 이터널 저니를 두리번거리며 이달의 추천 서가를 하나씩 들여다본다.

사실 이곳의 눈부신 건축과 화려한 부대시설에 이끌려온 이라도 눈길이 머무는 순간은 따로 있다. 앞으로는 바다가, 뒤로는 숲이 완만하게 어우러진 아난티 코브 어디에서든 자연과 묘한 경계를 매만진 듯한 장면이 바라보이는 것. 펜트하우스의 로비부터 야외 테라스 그리고 리조트와 해안의 경계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서성이는 동안 모던한 건축과 자연이 그린 정경은 작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토록 바다를 여유 있게 바라보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김종관 감독과 함께 조심스레 오랑대까지 이어진 해안 산책로를 잠시 거닐어본다. 해가 반대편 숲으로 기울고, 쪽빛 바다는 구름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서서히 잠겨든다.
아난티 코브의 레지던스 객실로 돌아온 김종관 감독은 노트북을 꺼내 최근 촬영을 마친 편집본을 다듬는다. 꿈속에서 지난 기억을 반추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영화가 그의 다음 작품. “현재는 음악 작업 단계예요. 음악과 사운드 믹싱까지 마치고 나면 영화의 완성도가 마법처럼 달라지죠.” 그는 사방이 고요한 객실 소파에 기대 자신이 공들여 연출한 영상을 반복해서 리와인드한다. “사실 익숙한 공간보다는 덜 익숙한 공간이 작업에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익숙하지 않으면서 안락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차분하게 작업과 휴식을 이어가려는 창작자에게 아난티 코브는 이상적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DIRECTOR’S CUT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아난티 코브의 방 안에 들어가는 순간, 숲을 곁에 둔 저 욕조에 잠시 몸을 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구 중앙동
공원과 창고에서의 몽상

가랑비가 흩날리는 아침. 마지막 행선지는 부산역 인근의 중앙동이다. 부산항과 면하고 낡은 빌딩 사이로 관청과 사무실이 들어선 이곳은 서울로 치면 충무로의 풍경과 언뜻 닮아 보인다. 그리고 그 곁으로 서울 남산처럼 용두산이 솟아 있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주인공 은희와 그를 둘러싼 세 남자는 남산의 산책로를 오르내렸다. 오늘은 은희를 제외한 감독과 숨 가쁜 호흡을 내쉬며 용두산을 오른다. “예전에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용두산에 올라갔던 것 같은데….” 가파른 계단을 앞에 두고 김종관 감독은 잠시 과거의 어느 순간을 되짚는다. 그가 기억한 길은 반대편 광복동 방향. 중앙성당 앞에서 출발한 우리는 홀연히 솟아 있는 부산타워를 바라보며 공원 정상으로 향한다.
“참 오랜만이네요. 젊은 시절에는 부산을 찾을 때마다 왔었는데.” 그는 비가 촉촉하게 적신 용두산의 산책로를 걸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런 우중산책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영화를 한편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감독의 말을 듣고 문득 부산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하루> 속편을 떠올려본다. 부산에 살고 있는 은희는 또 어떤 연애담을 풀어놓을지, 산모퉁이의 낯익은 바가 어떻게 등장할지, 영도 어딘가의 풍경 좋은 책방에선 누구와 커피를 마실지 등.

용두산 아래 부산항 방면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1950년에 지은 한 곡물 저장 창고가 노티스란 이름을 내걸고 정식 오픈을 준비 중이다. 한동안 비욘드 개러지로 운영하던 이곳은 부산 청년의 소셜 기업 배러먼데이가 위탁 운영을 맡으면서 공간의 쓰임새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간 이곳은 유행에 민감한 이벤트에만 치중했죠. 이제는 부산의 문화를 보다 폭넓게 즐기는 공간으로 바꿔나갈 예정이에요.” 노티스의 홍보를 담당하는 안성배 씨가 의욕에 찬 목소리로 달라진 창고 곳곳을 안내한다. 1층 비비드 인더스트리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2층 저스트 프레시에선 부산 각지에서 생산된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가령 부산을 상징하는 로스터리 카페 모모스커피와 초량 845의 디저트 등을 선보이는 식이다. 비비드 인더스트리에선 영화 <심야식당>에서 영감을 얻은 메뉴를 내는 소셜 다이닝도 비정기적으로 준비한다고. 우연한 여행으로 비롯된 김종관 감독의 부산 로케이션 영화가 현실로 이뤄진다면 이 낡은 창고에서 아담한 상영회를 열어도 좋을 것 같다는 몽상이 하나 더 추가된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김종관 감독과 중앙동 골목을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그는 누군가와, 혹은 홀로 한 번쯤 지나쳤던 상점과 궁금증을 일으키는 카페 앞을 서성인다. 그렇게 지난 이틀간 우연과 인연이 중첩된, 꼬리를 물듯 이어진 여정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골목 산책을 하염없이 이어간다.
DIRECTOR’S CUT

“옛 창고를 밝히는 스탠드와 오래된 항구가 맞닿은 정갈한 프레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