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쉼표를 찍어야 할까? 잠의 필요성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 워커홀릭.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 뭔가 하지 않고 쉬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 멈추면 뒤쳐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

인류가 쓴 가장 위대한 책 < 종의 기원 >에서 찰스 다윈은 “끝없는 생명들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놀랍도록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으며 진화해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더 이상 다윈의 이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종간의 진화 여부야 여전히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생명의 점진적 진화(소진화)는 대부분이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진화는 일관되게 ‘생명 연장’에 목적이 있습니다. 다윈이 예로 든 갈라파고스의 핀치새는 생명 연장을 위해 부리를 발전시켰습니다. 단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도록 핀치새의 부리는 서식 지역에 따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바뀌는 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단언컨대 ‘수면’입니다. 진화가 생명을 늘리기 위한 가장 본능적 수단이라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심지어 식물도) 잠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시에서 현대 사회까지 잠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잠은 극도의 문명사회인 지금까지도 생명을 위협합니다. 대부분의 사건 사고가 항상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일어나지 않던가요. 저 옛날 약육강식의 시대에는 잠은 극도로 위험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잠의 유용성

이렇게나 위험한 잠을 여전히 우리 몸이 극도로 원하는 건, 그 필요성 때문입니다. 잠은 과학적으로 몸에 매우 필수적입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우리 몸은 쌓인 피로를 풀 수 없고, 뇌는 쉴 시간을 가지지 못합니다. 심신(心身)에 쌓인 스트레스를 배출해낼 수도 없습니다.
물론 한때 과학자들은 잠의 과학적 기능을 매우 과소평가했었습니다. 그저 ‘뇌’가 쉬는 시간으로 치부했던 것이죠. 하지만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칼텍) 연구팀이 <커런트 바이올러지>에 내놓은 결과는 잠이 단순한 뇌의 활동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연구팀은 해저에서 사는 ‘뇌가 없는’ 해파리를 주야로 관찰한 결과 낮에는 촉수의 움직임이 20분당 평균 1155회에 달하는데, 밤에는 고작 781회에 머무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또 잠을 자는 밤에 자극을 줘 잠이 들지 않게 하자 낮 시간의 활동량이 크게 줄어드는 것을 확인, 해파리도 수면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잠이 뇌뿐 아니라 온몸과 마음을 쉬게 해 충전의 시간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잠은 기억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잠은 얕은 수면인 렘(REM)-수면과 깊게 잠이 드는 비(非)렘-수면으로 나뉘는데, 이 비렘-수면 단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 뇌에서는 대뇌피질에서 약 1Hz 정도의 아주 느린 뇌파가 흐르고 이것이 기억을 편집해 해마에 전달해 저장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잠을 아주 푹 잘 수록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것이죠. 머리만 대면 잠이 들던 어린 시절의 기억력이 잠이 줄어든 지금보다 좋은 건 과학적으로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잠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013년 < 사이언스 >는 그해의 10대 연구 성과 중 하나로 ‘잠이 뇌의 독소를 제거한다’는 연구를 꼽았습니다. 연구를 진행한 미국 로체스터대 마이켄 네더가르드 교수는 “잠을 잘 때 두뇌 세포 사이의 공간이 넓어지고 그 안에 쌓인 독소를 물청소하듯 제거한다”며 “뇌세포의 노폐물 중에서는 알츠하이머를 유발하는 나쁜 단백질이 있는 데 이것도 잠을 잘 때 제거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잘 쉬는 법

진화에서 잠이 생략된 건 결국 그 기능 때문입니다. 잠을 유지하는 것이, 잠으로 인해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 생명 연장에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피로를 풀고, 기억력을 높이며, 독소를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등의 일들 말이죠.
반대로 잠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거나 애초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면 앞서 말한 여러 좋은 일은 우리 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 몸은 더더욱 깊은 잠을 원하게 됩니다. 잠은 곧 비움의 시간이자, 채움의 시간이니 말입니다.
잠이 본능적으로 우리 몸을 충전하는 시간이라면 휴식은 자의적 충전의 시간입니다. 하루의 1/3에 해당하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천양지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고 피로만 쌓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영학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이에 “휴식이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휴식은 곧 회복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휴식을 유용하게 보내는 방법은 갖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스트레스 해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모두 매우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자기계발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 또한 휴식을 보내는 모범답안입니다.
보다 중요한 건 휴식을 그저 보내지 않겠다는 ‘고민’입니다. 잠은 아무 고민이 없어도 우리 몸에서 각종 활약을 펼치지만 휴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휴식을 어떻게 보내겠다는 고민이 없이는 ‘무의미’의 무(無)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고민이 있다면 휴식 시간에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건 의미 있는 휴식이 됩니다.
때마침 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으로 휴식의 시간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꽤나 달라질 것은 자명합니다. 얕은 수면으로 피곤함과 두통만을 가득 채울지, 비렘-수면과 같은 충전의 시간이 될지 말입니다.
채움의 시간

최근 출판계에서 입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책 중 하나는 허혁 씨의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그냥 버스기사 아저씨가 쓴 책입니다. 허씨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53세의 아저씨입니다. 이전까지 출간 경력은 전혀 없을뿐더러, 버스기사 전에 한 일은 그저 작은 장사였습니다.
이런 허씨의 책에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호평을 하는 이유는 그의 글에 고민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버스를 몰며 만난 사람, 처했던 사소한 상황 하나하나를 몸으로 고민하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그는 글로 옮겼습니다. 그의 글에 유려한 문체는 없지만, 그의 삶과 애환이 진득하게 묻어있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 김민섭 씨는 “이 책을 읽은 당신이 몸에 새겨진 언어들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평했습니다. 이 말처럼 우리의 쉼표가 고민으로 똘똘 뭉쳐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결과물이 어떻든 우리는 한 걸음 더 진화할 수 있습니다. 잠이 우리를 회복시키듯, 쉼이 우리의 일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