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비수기에도 '완벽한 타인'이 흥행한 이유

38억원 제작비로 180만 손익분기점 가볍게 넘긴 ‘완벽한 타인'
흥행 이유는 ‘완벽한' 리메이크 시나리오
최근 한국 영화 위기는 시나리오 작가의 대거 드라마 작가 전업으로 발생

전통적으로 11월은 극장가의 비수기로 꼽힌다. 그래서 각 배급사들도 자사의 라인업을 성수기용 영화와 비수기용 영화로 나누고, 11월에는 이른바 ‘센’ 영화보다는 제작비 규모가 작은 작품들을 내놓기 마련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수가 적으니 만약 흥행이 되지 않더라도 손해 폭이 크지 않은 작품을 11월에 배치하는 게 상례가 되었다.

그러나 가끔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2014) 같은 작품은 11월 초 개봉했음에도 천만 관객을 불러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예외적 사례는 작품이 괜찮고 관람 만족도가 높다면 아무리 비수기라 할지라도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극장을 찾는다는 방증이다.
◇ 개봉 첫주부터 흥행몰이, 밀도 높은 시나리오로 공감대 끌어내
올해 11월에도 예외적 사례가 생겼다. ‘완벽한 타인’이 그 주인공이다. 개봉 첫 주말 이미 166만 명이라는 상당한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다. 평일에도 계속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며 매일 18만 명 안팎의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제작비도 비교적 적은 38억 원이라 손익분기점이 180만 명에 불과하다. 개봉 6일만에 손익분기점을 가볍게 넘어섰다.
‘완벽한 타인’은 중년 부부 세 커플과 한 명의 싱글남이 집들이 파티 자리에서 각자의 휴대폰을 공개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내내 집안에서 이들이 펼치는 대화와 갑론을박, 웃고 넘어갈 수 없는 갈등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들이 내뱉는 대사가 아주 찰지고, 휴대폰을 공개함으로써 벌어지는 상황이 매우 현실적이어서 관객들의 광범위한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유해진, 조진웅, 염정아 등 연기파 배우들이 펼치는 일상 연기도 흥행을 한 몫 거든 요인으로 꼽힌다.

이 영화의 흥행은 그동안 부진을 면치 못했던 한국영화계에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의 재미는 돈의 힘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 즉 시나리오다. ‘완벽한 타인’은 비록 이탈리아 영화를 리메이크했지만, 원작의 밀도 높은 시나리오를 한국적 상황과 배우들의 개성에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의 한국영화들은 이른바 콘셉트에서 출발하는 기획 영화가 대다수였다. 기획 영화란 흥행이 될 만한 몇 가지 요소에서 출발해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스타 캐스팅으로 미디어와 관객의 관심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창궐’이 대표적인 기획 영화의 사례다. 조선시대의 좀비, 현빈과 장동건의 대립. ‘창궐’은 사실상 이 두 가지 콘셉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은 그 콘셉트에 매몰된 나머지 시나리오의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 소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내가 속한 영화주간지에서 영화 제작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우리는 ‘영화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제작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 편당 3천~6천만원 받으며 수정 거듭하는 작가 시스템 개선해야
그런데 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최근 충무로에는 ‘괜찮은 시나리오가 없다‘는 아우성이 메아리치고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건 그토록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 말하던 영화 제작자들이 자초한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받는 대우는 편당 3천만 원에서 많게는 6천만 원 정도까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그냥 시나리오를 써서 넘기는 게 아니라 최대 열 차례기 넘는 수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는 대가다.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는 데 통상 1년여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결코 높은 수준의 대우가 아니다. 각본가들에 대한 대우가 이러하니, 많은 작가들이 요즘 시장이 대폭 커진 TV 드라마 쪽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그러니 영화계에 시나리오 기근 현상이 벌어진 건 사실상 필연적이었다.
좋은 시나리오가 없다 보니 외국 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들이 줄줄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 극장가는 제작자들에겐 다행스럽게도 한국영화 아니면 미국영화 일색이어서 ‘독전’처럼 중국 영화를, ‘완벽한 타인’처럼 이탈리아 영화를 리메이크해도 순수창작물로 여겨질 정도다.
리메이크작의 범람을 반드시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오리지널리티의 실종 현상에 대해서는 우려를 품는 데 인색할 필요까진 없다. 한국영화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논평이다. 관객들은 언제나 밀도 높은 이야기와 볼거리를 갖춘 영화를 원한다. 그럼에도 한국영화는 그런 미덕을 갖춘 시나리오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헛물만 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