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통신망 허브' 절반은 백업회선 없어… 사고 나면 속수무책

아현지사도 해당… 마포·서대문 등 서울 중서부 통신대란 불러
소방설비 의무설치 구역 아니라 스프링클러 없이 소화기만 비치

지난 24일 오전 발생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KT 아현지사 지하 통신구 화재로 구리선인 일반 통신회선 16만8000회선, 광케이블 220조(組·1조는 광케이블 24~48개 묶음)가 소실됐다. 서울역과 신촌을 연결하는 통신망이 불에 타자 서울 중·서부 지역 KT 인터넷망과 휴대전화 서비스가 중단됐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25일 합동 감식을 벌여 "지하 통신구 150m 가운데 79m가량이 소실됐다"면서도 화재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26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2차 감식을 벌일 예정이다.

불이 난 아현지사는 KT 전국 지사 가운데 통신망 허브(hub) 역할을 하는 56곳 중 하나다. 정부가 정하는 보안 등급(A~D등급)에서는 가장 낮은 D등급(총 27곳)이다. "피해 발생 시 일부 지역에만 영향을 준다"는 이유다. A~C급과 달리 D등급은 비상 우회 회선을 두지 않아 사고가 나면 통신이 곧바로 마비된다.

사고가 난 통신구엔 소화기가 1대밖에 비치돼 있지 않았다. 스프링클러 같은 자동 소화 시설이 없었다. 현행법상 소방 설비 설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94년 서울 종로5가 통신구 화재 이후 '소방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통신구 화재 예방 기준을 강화했다. 수도·전기·가스 등이 집중된 '지하 공동구'이거나, 폭 1.8m 이상, 높이 2m 이상, 길이 50m 이상(전력·통신사업용은 500m 이상)인 지하구에는 자동 화재 탐지 설비와 스프링클러 등 연소 방지 설비 설치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이번에 불이 난 KT 아현지사 통신구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통신망과 광케이블 등 통신 설비만 설치된 '단일 통신구'이고, 길이도 150m였기 때문이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 설비만 잘 설치돼 있었더라도 화재 피해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며 "다만 현실적으로 규모가 작은 통신구까지 소방 설비를 모두 설치·유지하고,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데 사회적 합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통신선 자체에서 불이 시작될 가능성은 작다고 했다. 1994년 서울 종로5가 통신구 화재는 통신구에 물이 차지 않게 하는 배수 펌프의 자동분전반에서 불이 시작돼 통신선으로 옮아 붙었다는 게 당시 조사 결과였다. 2000년 서울 여의도 화재도 통신선 자체가 아닌 함께 있던 전력 케이블 과부하 등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번에 불이 난 KT 아현지사 통신구는 고압 전력선 없이 통신선만 지나간다. 작업용 전등이 설치돼 있다고 한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전등을 꺼놓더라도 차단기를 내리지 않는 이상 전류는 늘 흐르기 때문에 여기서 불이 시작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은 방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해당 통신구는 KT 아현지사 지하실이나 통신구 위 4m쯤에 있는 맨홀 뚜껑으로 접근할 수 있다. 제진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전류량이 미미한 통신케이블에서 화재가 난 것으로 볼 때 방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KT 측은 "불을 지르려고 통신구 내부로 들어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KT 관계자는 "아현지사 지하실로 들어가려면 건물 내부 경비와 출입증 확인을 거쳐야 한다"며 "맨홀 쪽도 뚜껑을 열고도 4m를 내려가 내부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어야 하는데, 대낮에 누군가 이렇게 접근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소방 당국은 210명과 차량 62대를 투입해 불 끄기에 나섰지만, 화재 신고가 접수된 지 10여 시간 만인 24일 오후 9시 26분에야 완전히 불을 잡을 수 있었다. KT 관계자는 "연기를 보고 곧장 신고했지만 통신 케이블 피복이 타면서 독성가스가 통신구를 뒤덮어 소방관 진입이 늦어졌다"고 했다. 인세진 우송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통신선 화재를 이용한 테러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런 시설은 화재 예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